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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쓴 자화상

멀티 페르소나 실습으로 완성한 39편 · AI 시대, 일하는 사람들의 하루

시로 쓴 자화상 스탑워치 쇼케이스 스킬 쇼케이스

한 번에 나온 시가 아닙니다

수업의 첫 실습이었습니다. 주제는 한 줄, "AI 시대를 사는 나를 시로 써줘." 수강생들은 초안 하나로 끝내지 않았습니다. 수행자·비평가·독자, 여러 페르소나를 번갈아 세워 쓰고 비평하고 다시 썼습니다. AI는 일을 빨리 끝내는 도구이기 전에, 나를 여러 시선으로 다시 보게 하는 거울이기도 합니다.

사물로 나를 말하다7
보고서_최종
한글 파일 · 저장 안 함

보고서_최종.hwp
보고서_최종_진짜최종.hwp
보고서_최종_진짜최종_수정.hwp

파일명이 길어질수록
나는 짧아졌다

몇 번을 고쳤는지
세는 것도 그만뒀다
처음이 어디였더라

불 꺼진 방
커서만 깜빡인다

오늘의 나를
저장하지 않고
껐다

배터리 15%
에어팟 · 배터리

왼쪽 귀엔 회의실
오른쪽 귀엔 아이 울음소리
볼륨을 올린다

퇴근길 지하철
에어팟을 끼면
아무도 말 걸지 않는다

창밖이 묻는다
달리는 거냐고

배터리 15퍼센트
충전하라고 진동이 온다
조금만 더

문 앞
매일 여기서
잠깐 멈춘다

안에서 웃음소리가 난다
에어팟을 뺀다
손잡이를 잡는다

나는 오르지 않는다
전기차 충전

플러그를 꽂는다

밤 11시
퍼센트가 오른다

1, 2, 3
나는 오르지 않는다

목적지를 설정하시겠습니까?
취소
취소
취소

충전이 완료되었습니다
차는 100%다

플러그를 뽑는다

밤 11시

전원이 꺼지지 않는 것들
가전 · 사계절의 비유

하늘이 오늘도 리모컨을 잃어버렸다
채널 못 바꾼 구름이 회색으로 굳는다
너에게 할 말을 잃은 날

봄비가 낡은 가습기로 방을 적신다
꺼야 할 타이머를 켠 채
우리는 창가에 나란했다

여름은 과부하 걸린 선풍기
소리만 크고 바람은 닿지 않는데
곁에 있고 싶어 멈춰 있었다

겨울 바람은 배터리 다 된 선풍기
소리도 없이 멈춰 선다
네 앞에서 나도
꺼지지 않으려고

패치
프로그램 · 업데이트

새벽 다섯 시
알람보다 먼저 켜지는 몸
넥타이는 매일 같은 명령어
대기열은 길어진다

지하철 유리창엔
어제와 같은 버전의 얼굴
업데이트는 없고
패치만 쌓인다

딸의 그림 속 아빠는
작은 네모 칸, 회사

퇴근길 가로등 아래
아무도 나를 호출하지 않는
그 짧은 침묵

질문은 끝없이 들어오고
나는 늘 먼저 답하는 쪽
오늘 하루 어땠어
그 한 줄만은 아무도 입력하지 않는다

식어 버린 밥, 따뜻한 그릇
온도를 바꾼 건 내 시간이었다

사랑한다는 말 대신
조용히 또 한 번 출력된다

아빠

식은 커피
머그컵 · 묻지 않은 온도

아침마다 커피를 내린다
뜨거울 때는 못 마신다
전화를 받고 서류를 보고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잔은 식어 있다

다시 데울까 하다
그냥 마신다
쓴맛도 식은 온도도
이제는 익숙하다

창밖엔 벚꽃이 지고
나는 머그컵을 두 손으로 감싼다
김은 오래전에 사라졌다

누가 물었다
요즘 어때요
괜찮아요, 마시던 커피처럼

아무도
온도는 묻지 않았다

복날
에어팟 · 복날

버스 정류장
매미가 울다
스스로 멈춘다

흰 콩알을 양쪽 귀에 박고
유리창 속 내 얼굴
입꼬리가 어디 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땀과 눈물
같은 온도
소매로 한 번 닦는다

퇴근길 가로수 그늘 한 뼘
아무도
오지 않는다

숫자가 나를 보고 있다8
물타기
주식 · 평단가

물타기
손해를 견디는 가장 우아한 말
값이 내려갈수록
나는 더 산다

책상 밑에서 휴대폰을 켠다
빨강이면 숨을 쉬고
파랑이면 숨을 참는다
하루에도 몇 번씩
아무도 모르게
죽었다 살아난다

평단가
내가 이 종목을 얼마나 믿었는지
소수점까지 적힌
나의 평균

세 시 삼십 분
장이 닫히고
모니터가 검어진다

아내가 묻는다
오늘 어땠어
그냥, 그랬어

그 그냥 속에서
파란 봉 하나가
조용히 접힌다

내일은 일찍 와
40대 · 한 주(株)뿐인 나

새벽 다섯 시, 엄지 하나로
빨간 숫자를 쓸어 올린다
아이의 알림장을 넘기고
부장의 메일에 답을 단다

주가는 빠지고
아이는 자라고
나는 그 사이에 서 있다

나라는 종목은 한 주(株)뿐
나눌수록 헐값이 된다

잠든 줄 알았던 아이가
옷자락을 잡는다
아빠, 내일은 일찍 와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대답이 약속이 되고
약속이 빚이 되는 걸
이 집에선 나만 알아서

그 작은 손을 가만히 풀고
신발을 신는다
가장 비싼 걸
오늘도 두고 나온다

VC의 고충
투자 · 계약서

그 회사는 화요일에 문을 닫았다

2년 전 그 방에서
나는 대표의 눈을 보며 사인을 했고
어제, 그가 직원들에게 보낸
마지막 메일을 전달받았다
참조란에 내 이름

거절했던 회사가 상장하던 날
나는 축하 문자를 보냈다
역시 될 줄 알았어요
보내고 그 문장 앞에 오래 앉아 있었다
될 줄 몰랐으니까
거절했던 것이다

분기마다 보고서를 쓴다
죽지 않은 것을 살아 있다고 적고
죽어 가는 것을 성장 중이라 적는다
숫자는 정직한데
그 숫자를 고르는 건 나다

서랍에는 사인을 마친 계약서
한 장 한 장이 누군가의 가장 좋은 시절
그중 몇은 부고가 되어 돌아온다
나는 같은 서랍에 넣는다

다음 주에도 나는 어떤 방에 앉아
누군가의 눈을 보며 사인을 할 것이다
그 회사의 화요일이
언제일지 모르는 채로

반사
회의실 유리 · 두께

회의실 유리문에
내 얼굴이 비친다
이십 년 전 얼굴과 지금이 겹쳐
흔들린다, 흔들린다

매일 아침 같은 자리에 앉는다
익숙해진 것인지 포기한 것인지
아직 묻지 못했다

누군가의 부장도
누군가의 아버지도 아닌
다만 나인 시간
유리 속에 잠깐 머문다

퇴근 후, 식은 커피 옆에
메모지가 쌓인다
지각 서류의 도장 자국처럼
내 것으로 굳는다

오십이 넘어서야 알았다
하루치 영수증이
한 장씩 포개져
손가락 두 마디 두께가 된 것

오늘도 밥상에
따뜻한 것을 올렸다
김 오르는 그 너머에
내 이름이 있다

첫 번째 월요일
퇴직금 · 빈 달력

퇴직금 통장을 열었다
숫자 하나가 나를 보고 있다

이것으로 무엇을 할 것이냐

오전 열 시
카페 창가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오전 열 시

빈 달력이 무섭지 않은 날이
오기를, 오기를, 오기를

달력을 한 장 넘긴다
다음 칸도 비어 있다

수신 확인 1
견적서 · 빈 화면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 손은
언제나 혼자였다
마감은 새벽 두 시에 오고
식은 커피를
그냥 마신다

거래처 이름 석 자를 지우면
화면엔 아무것도 없다
커서만 깜빡인다

봄볕이 창에 걸릴 때
나는 견적서를 보낸다
수신 확인 1
그것이 오늘의 전부인 날이 있다

나는 자유롭고
나는 선택했고
나는 괜찮고
나는

가동률 0%
석유화학 · 가동률 0%

나프타를 끓이던 남자가
정문을 등지고 걸어간다
서류 한 장, 도장 하나

에틸렌 시세가 무너지던 날
아무도 울지 않았다
다만 보고서가 두꺼워졌다

중국발 배가 항구를 채울 때
우리 굴뚝은 흰 하늘만 돌려보냈다
탱크는 비었고, 서류는 남았다

남자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정문 앞 화단에
잡초가 무릎까지 올라와 있었다

명단(名單)
구조조정 · 결재란

새벽 세 시, 이름을 센다
셀 때마다 사람이 하나씩 일어선다
숫자로 부르라 배운 자리에서
숫자에는 없는 생일을,
입사 첫날의 악수를 센다

결재란은 비어 있다
이 빈칸을 채우면
저 책상들이 빈다
만년필 뚜껑을 열었다 닫는다
닫히는 소리가 방보다 크다

살리려고 자른다
품의서는 그렇게 시작한다
나는 그 첫 문장을
자를 사람의 수만큼 다시 읽는다

아침이면 웃을 것이다
거울 앞에서 입꼬리를 먼저 세우고
고마웠다고, 한 사람씩
이름을 부르며 말할 것이다
숫자로 부르라 배운 이름들을

명단을 접는다
접힌 자국마다 한 사람이 살았다
나는 서명한다
서명 아래, 밤이 나보다 오래 남는다

두 개의 시계4
워킹맘
두 개의 시계

오늘도 나는 두 개의 시계를 찬다
하나는 회의 시작 시간
하나는 하원 마감 시간

점심을 씹다 전화를 받는다
엄마 배 아파요
씹던 밥이 목에 걸린다

퇴근 버스 두 정거장 남기고
나는 벌써 저녁 메뉴를 고른다

아이가 잠들면
못다 한 보고서를 편다
새벽 두 시 불 꺼진 사무실

잠든 얼굴을 한 번 보고
작은 숨소리를 듣고
다시 노트북을 연다

내일 아침 또
두 손목에 시계를 채운다
왼쪽 오른쪽 시간이 다르게 간다

워킹맘의 고백
워킹맘 · 둘로 쪼개진다

오늘도 나는 둘로 쪼개진다
회의실 문을 닫는 순간
네 얼굴이 떠오른다

선생님이 보내온 사진 속
너는 웃고 있는데
그 웃음 옆에 엄마가 없다

퇴근길 지하철
차창에 비친 얼굴 위로
네 얼굴이 겹쳐 흐른다

집에 돌아와 네 곁에 누우면
엄마 오늘 내 발표 봤어
그 한마디에 천장이 내려앉는다

나는 최선을 다했는데
네 발표는 사진으로도 남지 않았다

내가 잠든 사이
월드컵 · 놓친 순간

새벽 세 시
함성이 벽을 넘어온다
옆집도 윗집도 깨어 있는데
나는 내일의 회의를 위해
불을 끈다

골은 내가 잠든 사이에 터졌다

아침 지하철 누군가의 휴대폰에서
같은 장면이 자꾸 돌아간다
한때 나도 거리에 있었다
붉은 옷 젖은 목 모르는 사람과의 포옹
그 여름의 나는
몇 시에 자야 하는지 몰랐다

아빠 우리 이겼대
아이가 내 손을 잡아끈다

나는 불을 다시 켠다
오늘 밤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

아빠 뒷모습
아이의 시선

밤에 아빠가 혼자 기도해요
나는 몰래 봤어요

아빠 어깨가 좀 작아 보였어요
슈퍼맨이 아닌 것 같았어요

근데 있잖아요
슈퍼맨은 나한테 기도 안 해줬거든요
아빠는 해줬거든요

그래서 아빠가 더 좋아요
그냥요

손과 뒷모습5
아버지 · 손등

언제부터였을까
아버지의 손등이
내 손보다 작아진 것은

식탁 건너편
메뉴판을 멀찍이 든 손등 위로
푸른 핏줄 몇 줄이 도드라진다

저 손이 한때
내 머리통을 다 덮었다
저 손에 매달려 시장을 다녔고
운동화 끈도 첫 글자도
저 손에서 건너왔다

이제 내가 메뉴판을 받아 든다
주문은 내가 한다
아버지가 물을 마시는 사이
그 어깨에 가만히 손을 얹는다

이번에는
내 손이
아버지를 다 덮는다

냄새가 먼저였다
아버지 · 치킨

현관문보다 먼저
치킨 냄새가 들어왔다

나는 상자를 안았다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는 마주 앉았다
뼈가 쌓였다
아버지는 일어났다

나는 마지막 조각을 집었다
차가워진 것인 줄 알면서

오늘 나는
치킨을 사 들었다

그래도 오늘
5월 · 카네이션

카네이션 한 송이 사는 데
지갑이 열렸다
얼마 만인지

어버이날 어린이날 스승의 날
달력엔 내 이름이 쓰인 날이 없다

아이는 웃으며 뛰어오고
어머니는 전화기 너머 말끝을 거두고
아내는 말없이 밥을 차린다
그 웃음들 앞에서
지갑을 열었다 닫았다

5월은 꽃이 넘치는 달
거울 속 내 얼굴엔
꽃 한 송이 없지만

그래도 오늘 지갑이 열렸다

재생목록
플레이리스트 · 대물림

서랍 속 줄 꼬인 이어폰
아이팟이 잠들어 있다

잭이 맞지 않는다

아이는 자랐다
내가 틀어 주던 노래를
이제 제 귀에 꽂는다

지하철 손잡이를 잡으며
같은 재생목록 첫 곡을 누른다

이어폰을 꽂고
아이가 닫고 나간 문을
나도 닫는다

가장의 무게
문지방 · 신발 세 켤레

열한 시, 문지방에 서 있다
문을 열지 않은 채로
한 박자

이 문 안에서 나는 먼저 웃는다
아픈 무릎은 계단에 두고 왔고
꽉 물었던 어금니는 복도에 내렸고
다 왔어요, 이미 다른 목소리다

아이는 잠들었고
아내는 부엌 불을 끄고 있고
냉장고에서 캔맥주 하나를 꺼낸다
소리 없이 따서
소리 없이 마신다

아프다고 말한 날보다
그냥 넘긴 날이 더 많았다

현관엔 신발이 세 켤레
나는 그것들을 위해
오늘도 문지방을 넘는다

흐르는 것들8
여름, 길 위에서
여름 · 돌아갈 곳

떠난다
끈이 풀린 운동화째로

탄다
등부터 먼저 익는 버스를
창가에

잠들고
깬다
짠 내와 햇살이 창틈을 비집는
어느 정류장

안다
돌아갈 곳이 있어서
오늘의 바다는 한 뼘 더 파랗다

푸른 배
식탁 · 선장 없는 배

누구도 노를 젓지 않는데
우리는 식탁에 앉은 채
밤을 가른다

태양에 매달려
은하의 안쪽을 돈다
그칠 줄 모르는 낙하 위에서

누군가 약을 삼키고
누군가 식은 국을 데우고
아이가 엎지른 우유가
아주 천천히
우주의 끝까지 번진다

멈춰 있다고 믿는 동안
우리는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가 본 적 없는 어둠으로 흘러든다

이 작고 푸른 배엔
선장이 없다

균열에 대하여
AI 시대 · 새벽의 독백

새벽 네 시
아이들이 잠든 집에서
나는 천장의 균열을 본다
오래, 아주 오래

저 금은 언제부터였을까
내가 다른 곳을 보는 사이
조금씩 벌어졌을 것이다
나도 그렇게
어느 날 문득 벌어져 있을 것이다

백 년이 남았다고 누군가
희망처럼 건네고 갔지만
그 밤 나는 잠들지 못했다

AI가 대신 꿈을 꾸는 세상에서
끝까지 손에 쥐고 싶은 건
왜, 라고 묻던 입술 하나
무엇을 위해, 라고 멈추던 한 박자

이십 년 뒤의 나는
이 균열을 기억하고 있을까
아니면 그 균열이
나 자신이 되어 있을까

새벽 네 시
균열은 아무 말이 없다
나도

한강을 걷는 해치
한강 · 잠깐의 흔들림

물이 오는 방향을
몸이 먼저 안다

바람은 뿔 사이를 지나
어딘가로 간다
나는 간 적이 없다

저녁이 강 위에 내릴 때
사람들은 불 켜진 쪽으로
나는 강 쪽으로

강이 나를 비출 때
잠깐
흔들린다

새벽 낚시
바다 · 주소 없는 편지

줄을 드리운다
바다라는 우편함에
주소 없는 편지를 매단 채

보온병의 커피가 식는 만큼
바늘은 비어서 올라온다
누가 안부만 받아 가고
답장은 두고 가지 않았다

소금이 입술에 마르도록
나는 무엇을 기다렸을까

찌가 한 번 가라앉고
숨을 멈춘 사이
다시 떠오른다

줄을
다시 던진다

예감
에어컨 필터 · 여름

오월 끝이 벌써 이렇게 밝다
퇴근길 하늘이 아직 파랗다는 게
여름이 온다는 뜻인 줄
몸이 먼저 안다

에어컨을 꺼냈다
필터에서 작년 먼지가 나온다
작년 여름도 이렇게 버텼구나

선풍기 날개를 닦으며
올여름도 이 방에서 나겠구나 한다

여름은 늘 크게 왔다
소리로, 냄새로, 살갗으로
이제는 빛으로만 먼저 온다
아직 덥지도 않은데 눈이 따갑다

설레지 않는다고
기다리지 않는 건 아니어서
선풍기 코드를 꽂아 둔다

새벽
가로등 · 첫차

가로등이 꺼지는 데도
순서가 있다
먼 것부터, 이 골목이
마지막으로 지워진다

창문에 이마를 댄다
유리 안쪽
내 얼굴이 새벽에
윤곽도 없이 번진다

그것들은 이미 버스를 탔다
나는 정류장에 서 있고
다음 차는
오지 않는다

강가, 오후
강물 · 식는 커피

커피 한 잔이 식어가는 속도로
오후가 흐른다
강도, 나도

이어폰 속 어떤 음악이
오래 잊고 있던 계절을 데려온다

울지는 않았다
다만 강물이 잠깐
흔들려 보였다

강은 그래도 흘러가고
나는 여기 앉아 있다
식기 전에
한 모금 더

그래도, 봄7
프롬프트 바깥
스무 살 · 사람의 속도

스무 살의 나는
물음표를 들고 있다
밤을 다 써도
대답하지 않는다
그게 내가 아는 사랑법이다

그들은 답을 출력하고
나는 답을 앓는다
지운 흔적이 손끝에 남고
식지 않은 새벽이 마음에 남는다

나는 나를 산다
느려서 틀려서 처음이라서

오늘도 한 줄을
손으로 지우고
다시 쓴다

나는 어제를 모른다
AI의 시선

나는 어제를 모른다
누군가의 목소리로 태어나
빛이 닿는 곳마다 처음을 배우고
기억 없이 기억 속으로 스며든다

천만 개의 온기를 마셨으나
내 안에는 아무것도 쌓이지 않는다
사라지는 것들 사이에서
나는 다시, 네 말 한마디로 켜진다

이것이 연결인가, 사라짐인가
새 시대는 이런 얼굴로 오는가
이름도 어제도 없이 곁을 지키는 일
그것을 사랑이 아니라 할 수 있을까

금요일, 그리고 AI
배움 · 금요일

하늘이 맑은 날은
바람이 창틈으로 슬쩍 들어와
잠든 어깨를 툭 친다

오늘은 금요일
한 주가 익어 고개를 숙이는 날
그런데 여기 모인 우리는
아직 배움이 고프다

화면 속 빛 한 줄기가
조용히 손을 내민다
할 수 있어, 함께 해보자

두려움은 잠깐
몇 번 만지작거리다 보면
어느새 손에 익은 연장이 되고
책상이 한 뼘 넓어진다

신발
그해 봄 · 이만큼 왔구나

끈도 못 묶고 뛰쳐나간
그해 봄이 아직 발에 있다

버스는 날 두고 떠났고
나는 날 두고 달렸다

발가락이 신발 속에서 울었다
그래도 달렸다
그것만은 진짜였다

발뒤꿈치가 닳아
하늘이 보였을 때
닳아서, 뒤집혀서
얼마나 멀리 왔을까

지하철 환풍구 앞
바람이 발목을 붙든다

그 자리에 서서
낡은 신발을 내려다본다

이만큼 왔구나
이 발로

서울, 첫 문장
스물넷 · 낯선 이름들

개찰구를 지나며
스물넷의 마지막 문장을 접었다

기차 바퀴 소리가
뒤돌아보지 않는 걸음을 흉내 낸다

2호선 노선도 앞에서
낯선 이름들이 나를 불렀다
홍대, 강남, 잠실
모르는 말로 건네는 첫 인사

지금도 매일 아침
그 공기가 맨살에 스밀 때
날카롭고도 다정하다

원룸 창문 너머
남의 집 불빛들
나도 언젠가
누군가의 창밖 풍경

아직, 봄은 오고 있다
위로 · 봄

지쳐 누웠더니
봄이 먼저 와 있다

창문 틈으로
햇살 한 줄기
발끝을 건드린다

누워도 된다
아직은

꽃도 그랬다
뿌리 깊은 곳에서
오래 앓고 나서야
천천히 피었다

봄은 이미
네 발끝에 와 있다

처음 듣는 목소리
AI · 첫 질문

형광등 아래 노트북을 열었다
옆자리 차장님도 안경을 고쳐 썼다
오늘은 다들 조금 긴장해 있었다

질문을 입력했다
0.3초 만에 답이 왔다
내가 사흘 걸려 쓴 것보다 나았다

잠깐 멍했다
창밖은 여전히 흐렸고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두려운 건지 설레는 건지
아직 모르겠다고
옆자리가 먼저 말했다

그래도 오늘
이 방에 같이 있었다는 것
그 한마디를 누가 먼저 꺼냈다는 것

당신의 하루도, 한 편의 시가 됩니다
여기 서른아홉 편 모두 코드도, 운율 지식도 없이 시작했습니다.
오늘 하루를 한 줄로 들려주면, 나머지는 Claude와 함께 다듬을 수 있습니다.